
미국 하원 감독개혁위원회가 최근 제프리 엡스타인의 유산 측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 가운데 일부 이메일을 공개하면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엡스타인 사이의 관계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약 2만 쪽이 넘는 문서 중 선별된 이메일 일부가 공개된 것인데, 그 안에는 “트럼프가 엡스타인의 미성년 피해자들을 알고 있었다”는 취지의 내용이 포함돼 있어 정치권과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가장 눈길을 끈 내용은 2011년 엡스타인이 지인에게 보낸 이메일이다.
엡스타인은 트럼프를 가리켜 “아직 짖지 않은 개(the dog that hasn’t barked)”라고 표현하며, 피해자로 지목된 한 소녀가 “트럼프와 그의 집에서 몇 시간을 보냈다(spent hours at my house with him)”고 적었다.
이 피해자는 문서 원본에서는 이름이 가려져 있었지만, 백악관과 의회 설명, 그리고 미국 주요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버지니아 지프리(Virginia Giuffre)로 특정되고 있다.
지프리는 엡스타인 사건의 핵심 피해자로 알려진 인물이지만, 과거 인터뷰에서는 “트럼프가 자신에게 부적절한 행동을 한 적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럼에도 엡스타인의 이메일에 등장한 문장은 트럼프가 엡스타인의 사교 네트워크 안에 있었다는 정황을 다시 부각시키고 있다.
2019년 엡스타인이 작가 마이클 울프에게 보낸 이메일 역시 논란을 키우고 있다.
엡스타인은 이 메시지에서 “Of course he knew about the girls as he asked Ghislaine to stop.” (물론 트럼프는 소녀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기슬레인에게 그만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라고 적었다.
여기서 말하는 “the girls(그 소녀들)”은 특정 두세 명이 아니라, 엡스타인과 기슬레인 맥스웰이 장기간에 걸쳐 착취해 온 미성년자 피해자들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해석된다.
이들은 대부분 14~17세의 청소년이었고, 모델 제안·베이비시터 자리·마사지 아르바이트 등의 명목으로 엡스타인의 집으로 유인된 뒤 성적 착취 피해를 입었다.
맥스웰은 2021년 유죄 평결, 2022년 20년형을 선고받고 현재 복역 중이다.
엡스타인의 이 주장만으로 트럼프가 범죄를 알면서도 방조했다거나 연루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트럼프는 알고 있었다”는 표현이 공개되자, 정치권에서는 트럼프가 엡스타인의 범죄 구조를 어느 정도 인식했는지에 대한 새로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에서는 피해자들의 이름이 대부분 가려져 있다. 이는 피해자 보호 원칙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엡스타인 사건 자체가 워낙 많은 법정 기록과 증언을 낳아왔기 때문에,
2011년 이메일에서 언급된 “그 피해자 한 명”이 버지니아 지프리라는 점은 미국 정치권에서도 사실상 공개된 상태다.
지프리는 트럼프와의 만남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성착취 피해가 트럼프와 직접 연관된 적은 없다고 일관되게 말해왔다.
트럼프와 백악관은 즉각 반발했다.
백악관 대변인은 이번 자료 공개가 “민주당이 선택적으로 문서를 유출해 트럼프를 흠집내려는 정치적 시도”라고 비판했고, 트럼프 역시 이를 “엡스타인 사기(Epstein hoax)”라고 부르며, “민주당이 정부 셧다운 문제에서 시선을 돌리기 위해 꺼내든 카드”라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과거 인터뷰에서도 “엡스타인을 알았지만 멀어졌고, 더 이상 관련이 없다”고 말해왔다.
이번 이메일 공개를 계기로 하원에서는 엡스타인 관련 전면 자료 공개 요구가 다시 커지고 있다.
눈여겨볼 점은, 이번 요구가 민주당뿐 아니라 일부 공화당 의원들과 함께 초당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의회에서는 법무부·연방법원에 보관된 엡스타인 관련 기록을 모두 공개하는 법안까지 논의되고 있다.
이는 엡스타인의 성범죄 네트워크가 미국 상류층 인사들, 정치권, 재계와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지 확인하려는 흐름으로 분석된다.
현재까지 공개된 이메일은 어디까지나 엡스타인의 일방적인 표현과 서술이 담긴 문서일 뿐이다.
트럼프가 엡스타인의 범죄에 연루되었다는 증거나 기소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이메일들이 불러온 파장은 작지 않다.
엡스타인과 맥스웰이 만든 성착취 네트워크가 얼마나 광범위했는지, 또 그 주변에서 누가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이 다시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트럼프는 무엇을 알고 있었는가?”라는 질문은 앞으로 정치적 논쟁의 중심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