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이름은 세계기상기구(WMO) 산하 태풍위원회가 정한다. 이 위원회에는 한국, 일본, 중국, 북한, 미국, 필리핀 등 14개 나라가 참여한다. 각국은 10개씩 총 140개의 이름을 제출해 놓고, 태풍이 발생할 때마다 순서대로 붙인다. 때문에 북서태평양에서 발생한 태풍에는 영어, 한자, 한국어, 태국어, 캄보디아어 등 다양한 언어가 뒤섞인다.
과거에는 단순히 “제○호 태풍” 식으로 불렀다. 그러나 동시에 여러 태풍이 발생할 경우 혼동이 커지고, 대중에게 경각심을 주기 어려웠다. 2000년부터는 기억하기 쉬운 이름을 붙여 재난 대응 효율을 높이고, 피해 예방 효과를 노리게 됐다. 예컨대 “2003년 제14호 태풍”보다 “태풍 매미”라고 하면 훨씬 명확하다.
한국은 문화적 색채가 담긴 이름을 제출해 왔다. ‘가이(강하다)’, ‘나리(백합)’, ‘장미’, ‘무지개’, ‘흰남노(흰 나무)’ 등이 그것이다. 특히 2007년의 ‘나리’는 제주에 큰 피해를 남겨 이름이 퇴출됐다. 2022년의 ‘흰남노’는 포항·부산을 덮치며 심각한 침수 피해를 남겼다. 이후 ‘흰남노’라는 이름은 다시 쓰이지 않게 됐고, 한국은 새로운 이름을 제출할 예정이다.
일본은 별자리와 자연 현상에서 이름을 많이 가져온다. ‘야기(염소자리)’, ‘텐빈(천칭자리)’, ‘하기비스(빠르다, 필리핀어)’ 같은 이름이 대표적이다.
중국은 동물 이름을 선호한다. ‘사자’, ‘용왕(룽왕)’, ‘바비(호랑이)’ 등은 중국에서 제출한 이름이다.
필리핀은 인명(사람 이름)을 자주 사용한다. 그래서 ‘호세’, ‘로사’, ‘다나스(경험하다)’처럼 친근한 느낌의 이름들이 등장한다. 이렇듯 태풍 이름만 보아도 아시아 각국의 문화적 취향과 언어 감각을 엿볼 수 있다.
태풍이 유난히 큰 피해를 남기면, 그 이름은 더 이상 쓰이지 않는다. 가장 잘 알려진 사례가 2003년 태풍 ‘매미’다. 131명이 숨지고 4조 원이 넘는 피해를 남긴 뒤, ‘매미’라는 이름은 영구 퇴출됐다. 한국이 제출한 ‘나리’ 역시 같은 이유로 사라졌다. 이는 피해자의 아픔을 존중하고, 같은 이름으로 다시 공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국제적 합의다.
퇴출되지 않은 이름은 일정 주기가 지나면 다시 돌아온다. 총 140개 이름이 돌고 도는 구조라, 약 5~6년 뒤 같은 이름을 또 만나게 된다. 예컨대 2018년에 쓰였던 ‘콩레이(중국어로 장미)’는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수 있다. 그래서 “이 이름, 예전에 들어본 것 같은데?”라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생긴다.
태풍 이름은 단순한 명칭이 아니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존중하면서도, 공동의 리스트를 만들고 관리하는 것은 재난 앞에서 국제 사회가 협력한다는 상징이다. 태풍은 국경을 가리지 않고 이동하기 때문에, 이름을 통해 공유되는 정보 체계는 곧 공동 대응의 출발점이 된다.
우리가 무심코 듣는 태풍 이름 하나에도 사실은 국제 협력의 역사와 각국 문화의 흔적이 담겨 있다. “흰남노”처럼 한국어가 세계 방송에서 그대로 불리고, “하이옌”처럼 특정 지역의 아픔이 기억되는 이름도 있다. 태풍은 매년 되풀이되지만, 그 이름들을 따라가다 보면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닌 인간 사회의 협력과 기억의 무게가 함께 흐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