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에서 밀려나는 중년들, ‘정년’은커녕 ‘절단’의 시대
“희망퇴직이요? 저희는 희망도 없이 나왔습니다.”
서울 강남의 한 대기업에서 28년을 근속한 김모 씨(52)는 회사가 건넨 희망퇴직 서류를 받아들고, 책상 서랍을 정리했다. 그는 여전히 주어진 업무를 완수할 수 있는 체력도, 전문성도 자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구조조정 1순위’ 명단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알게 됐다. 50대의 삶은 더 이상 경험과 연륜의 상징이 아니라, “인건비 부담”이라는 이름 아래 정리 대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50대 학살이 시작됐다.
2025년의 고용시장은 조용한 학살의 전장이다. 명예퇴직, 희망퇴직, 권고사직, 조직개편. 이름만 다를 뿐 본질은 같다. 조직에서 50대를 쓸모없는 존재로 낙인찍고 조용히, 그러나 대대적으로 내쫓는 구조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난 6월, 글로벌 기업 마이크로소프트(MS)는 단일 기업 기준으로 무려 9000명의 구조조정을 발표했다. 그중 다수는 중간 관리자급, 40~50대 인력들이었다. ‘조직 슬림화’라는 미명 아래, 오랜 경험과 축적된 지식은 퇴직 패키지와 맞바뀌었다. 그리고 이 흐름은 국경을 넘어, 한국의 대기업들까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KT는 2800명의 직원에게 희망퇴직을 권고했고, LG유플러스, SK텔레콤, 엔씨소프트 등 주요 기업들도 유사한 방식의 구조조정을 연이어 감행했다. 그 타깃은 대부분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의 관리자급 인력이다. “인건비 부담”이라는 말 뒤에는, 그들의 이름과 가족, 미래가 지워졌다.
통계청이 발표한 고용 자료에 따르면, 2024년 기준 40~50대 비자발적 퇴직 비율은 50.8%에 이른다. 이는 전체 연령 평균(44.4%)보다도 높은 수치다. 정년은커녕, 체감 정년이 50세로 무너졌다는 이야기가 우스갯소리가 아닌 현실이 된 것이다.
더욱 심각한 건, 퇴직 이후의 풍경이다. 대다수 50대 퇴직자들은 중소기업이나 파견직, 계약직 일자리를 전전하게 된다. 임금은 절반 이하로 떨어지고, 사회적 지위는 말할 수 없이 하락한다. 재취업은 사실상 ‘하강의 선택지’가 된 셈이다.
이처럼 50대는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의 구조조정에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노출되는 계층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임금은 높고, 젊은 세대보다 기술 적응력이 떨어진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특히 디지털 전환과 인공지능(AI) 도입이 본격화되며, 기업들은 관리자 중심의 인력을 “낡은 부품”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은행권에서도 50대 지점장조차 ‘정리’의 대상이 됐다. AI와 무인화 시스템이 지점 운영을 대체하면서, ‘사람이 굳이 필요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기업이 말하는 효율성 뒤에는 그들이 쌓아온 수십 년의 경력, 후배를 양성해온 리더십, 위기 상황을 버텨낸 책임감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단지 “높은 연봉” 하나로 폐기 대상이 되는 현실. 그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직면한 진짜 문제다.
이 ‘50대 학살’은 단지 중년 개인의 위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가정의 기반이 흔들리고, 사회의 중간층이 무너지며, 세대 간 신뢰가 무너지는 재앙으로 이어진다. 청년은 진입하지 못하고, 중년은 퇴출당하며, 고령층은 관제 일자리에 머무르는 고용 피라미드는 한국 경제를 더욱 취약하게 만들고 있다.
정부는 이제라도 인식의 틀을 바꿔야 한다. 단기적 재취업 프로그램에 그칠 것이 아니라, 50대를 다시 사회의 ‘주력 노동력’으로 바라보는 프레임 전환이 시급하다. 직무 재교육, 탄력적 근로 모델, 중장년 맞춤형 일자리 창출이 필요한 시점이다.
기업 역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경영 효율성을 핑계로 ‘사람’을 기계처럼 취급하는 관행은 기업 문화의 미래를 갉아먹는다. 중년 인력의 경험과 노하우를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활용하지 못하는 기업은 결국 경쟁력을 잃게 될 것이다.
“퇴직을 당한 뒤, 진짜 나를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전직 대기업 부장은 고개를 숙였다. 그는 대한민국의 중년이자, 더는 필요하지 않다는 판정을 받은 가장이었다.
이제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정말로 그들이 쓸모없는 존재였던가? 아니면 우리가 그들을 쓸모없다고 취급한 것뿐인가? 지금 시작된 ‘50대 학살’은 단지 고용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누구를 가치 있게 여기는 사회인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