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말이면 빠지지 않는 고민이 있다. 감기약, 진통제, 항생제, 수면제, 혈압약… “이 정도 약은 먹어도 술 한 잔쯤 괜찮겠지?”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말한다. 약과 술은 ‘같이 먹어도 되는지’가 아니라 ‘왜 위험해질 수 있는지’를 먼저 따져야 한다고.
알코올은 그 자체로도 몸의 균형을 흔든다. 더 문제는, 약이 작동하는 경로(흡수·대사·배출·뇌신경 작용)에 알코올이 끼어들면서 효과가 과장되거나(과다진정), 반대로 약효가 떨어지거나, 때로는 독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약 대부분은 간에서 분해된다. 알코올도 마찬가지다. 같은 공장(간)에서 동시에 처리하려다 보니, 약물 농도가 예상보다 올라가거나(부작용↑), 특정 약은 독성 부산물이 남을 수 있다. 특히 간에 부담을 주는 약과 술이 겹치면 위험 신호가 빨리 켜진다.
여기에 알코올은 뇌를 진정시키는 성질(중추신경 억제)도 갖는다. 그래서 졸림을 유발하는 약과 함께하면 “좀 취했다” 수준이 아니라 호흡 억제 같은 응급 상황으로 번질 수 있다.

수면제, 진정제, 일부 항불안제(특히 벤조디아제핀 계열)는 술과 같이 들어가면 진정 효과가 겹쳐 균형감각 상실, 기억 소실, 실신을 넘어 호흡이 느려지거나 멈출 위험까지 커진다.
CDC와 FDA는 오피오이드와 술(또는 다른 중추신경 억제제)을 함께 사용할 때 치명적 호흡 억제 위험을 강하게 경고한다. “취함”이 아니라 뇌가 호흡을 ‘잊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이야기다.
대표적으로 메트로니다졸, 티니다졸은 술과 섞이면 얼굴 홍조, 심장 두근거림, 구토, 복통 같은 “갑자기 망가지는 느낌”의 반응이 생길 수 있어 금기가 자주 강조된다. NHS는 메트로니다졸은 중단 후 48시간, 티니다졸은 72시간까지도 술을 피하라고 안내한다.

졸림을 유발하는 성분이 들어 있으면 술과 함께 반응속도 저하·낙상·운전사고 위험이 커진다. 연말 술자리 이후 ‘귀가길’이 가장 위험해지는 조합이다.
아세트아미노펜(타이레놀 성분)은 용량 자체도 중요하지만, 음주가 겹치면 간이 받는 부담이 커진다는 경고가 반복돼 왔다.
혈액응고에 영향을 주는 약은 음주 습관에 따라 약효가 흔들릴 수 있어, “오늘만 한 잔”이 예상 밖의 출혈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정부 자료에서도 혈압약·심장약과 음주가 겹칠 때 과도한 이뇨·탈수, 어지럼증으로 인한 사고 위험 등을 경고한다.

“음주 금지/주의”, “졸음 유발”, “중추신경 억제” 같은 문구가 있으면, 그날 술은 ‘안전 운전’이 아니라 ‘안전 복용’ 기준으로 접는 게 맞다.
항생제라도 다 같은 항생제가 아니고, 진통제라도 다 같은 진통제가 아니다. 특히 메트로니다졸·티니다졸, 수면제/진정제, 오피오이드가 포함돼 있다면 “한 잔”이 통하지 않는다.
FDA는 오피오이드와 벤조디아제핀 등 중추신경 억제제(술 포함)를 함께 쓴 뒤 극심한 졸림, 비정상적 어지럼, 호흡이 느리거나 힘듦, 반응 없음이 나타나면 즉시 의료 도움을 받으라고 안내한다.
연말 약속은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약을 먹는 중이라면 ‘오늘만’이 가장 위험한 날이 될 수 있다. 술은 기분을 올리지만, 약과 만나면 부작용의 확률까지 끌어올린다는 점이 핵심이다.
가장 현실적인 원칙은 단순하다. 약 이름을 정확히 알고, 금기 조합(수면제·진정제·오피오이드·특정 항생제)을 피하고, 애매하면 약사에게 확인한 뒤 결정하는 것. 연말 술자리에서 가장 비싼 건 술값이 아니라, 방심으로 치르는 대가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