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D.C.에서 열린 첫 한·미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재명 대통령을 “위대한 지도자”라 칭하며 “미국으로부터 완전한 지원을 받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약속했다. 회담 직전까지만 해도 SNS를 통해 “한국 상황은 숙청 또는 혁명 같다”고 돌발 발언을 쏟아냈던 트럼프가 회담장에서는 돌연 태도를 바꿔 이재명을 추켜세운 것이다. 이 장면은 한국 극우 진영에 적잖은 충격을 안겼다. 트럼프가 윤석열 전 대통령을 도와 한국 보수 재집권의 희망이 될 것이라 기대했던 극우 세력은 예상과 다른 결과에 깊은 당혹감을 표하고 있다.
정상회담이 열리기 불과 몇 시간 전,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SNS ‘트루스소셜’에 “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숙청(Purge) 또는 혁명(Revolution) 같다. 그런 상황에서는 사업을 할 수 없다”라는 글을 게시했다. 한국 내 극우층은 즉각 이 글을 인용하며 이재명 정부를 공격했고, 일부 보수 정치인들도 이를 확대 재생산하며 “한국 정치가 국제적으로 불안정하게 보이고 있다”는 프레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회담장에서 트럼프는 “그건 오해였음을 확신한다”고 수습하며, 한국 국민에 대한 따뜻한 감정을 드러냈다. 곧바로 이재명 대통령을 “위대한 지도자”라 추켜세우고, 미국의 전폭적 지지를 약속하는 발언을 이어갔다. 전형적인 트럼프 式 협상 전술이라는 분석이 가능하지만, 한국 극우에게는 뼈아픈 반전이었다.
트럼프의 극찬은 단순한 외교적 수사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재명 대통령과의 회담이 “대단한 진전이었다”며 여러 차례 긍정적 평가를 반복했다. 나아가 “한국은 세계 최고의 조선 능력을 갖고 있다”며 경제 협력까지 적극 언급했다. 이러한 태도는 미국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을 파트너로 인정하고, 동맹 강화 의지를 재확인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국내 극우층에는 정반대의 효과를 낳았다. 이재명 대통령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순간은 곧, 그들이 그토록 의지하던 “트럼프 변수”가 자신들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그동안 한국 극우는 트럼프를 ‘외부 구원자’처럼 여겨왔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정치적 입지를 잃은 상황에서도 “트럼프가 다시 미국 대통령이 되면 윤석열 같은 인물이 재평가될 것”이라는 기대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일부 유튜브 채널과 커뮤니티에서는 “트럼프가 윤석열을 지원해야 한다”, “트럼프의 힘이 한국 보수를 살릴 것”이라는 주장도 반복됐다.
그러나 이번 회담에서 트럼프가 보여준 태도는 그들의 계산을 무너뜨렸다. 트럼프는 이재명을 향해 호감을 드러내며 협력 의지를 강조했고, 윤석열의 이름은 어디에서도 거론되지 않았다. 이는 극우층에게 “미국의 지지를 받아야만 보수 정권이 산다”는 기존의 공식이 흔들리는 계기가 되었다.
회담 직후 일부 극우 인사들은 SNS 게시글을 삭제하거나 수정을 시도했다. 트럼프의 발언을 근거로 이재명 정부를 공격하던 전략이 하루 만에 무력화되었기 때문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전체적으로는 깊은 실망감이 드러났다. 이 같은 반응은 극우 진영이 얼마나 트럼프에게 정치적 의존을 해왔는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그 의존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도 드러낸 셈이다.
사실 미국 대통령이 특정 국가의 특정 정치인을 노골적으로 지원하는 일은 외교 관례상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한국 극우는 트럼프의 돌발적 스타일을 근거로, 그가 윤석열을 돕고 이재명을 견제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이번 회담은 그 믿음이 환상에 불과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트럼프는 어디까지나 미국의 국익을 위해 움직였고, 한국의 정파적 이해와는 무관하게 협상을 주도했다.
결국 한국 극우의 실망은 단순히 “트럼프가 우리 편이 아니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의존하던 정치적 상징이 허망하게 무너졌다는 데서 비롯된다.
이번 정상회담은 이재명 대통령에게는 국제적 리더십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한국 극우 진영에는 깊은 혼란을 남겼다. 그들이 트럼프를 통해 기대했던 정치적 반전 시나리오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렇다면 극우는 앞으로 어떤 새로운 전략을 찾을 것인가. 트럼프 의존이라는 정치적 환상이 깨진 자리에서, 극우 진영이 어떤 방식으로 현실을 재구성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