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법무부와 연방수사국(FBI)이 보유한 제프리 앱스타인 관련 수사 기록, 이른바 ‘앱스타인 파일’의 전면 공개 시한이 다가오면서 워싱턴 정가가 들썩이고 있다.
의회를 통과한 ‘앱스타인 파일 투명법(Epstein Files Transparency Act)’은 법무장관에게 앱스타인과 기슬레인 맥스웰에 대한 정부의 모든 비기밀 수사 기록을 오는 12월 19일까지 공개하도록 의무화했다. 이 법안은 11월 19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하면서 발효됐다.
법에는 FBI의 인터뷰 메모, 수사 보고서, 비행기 로그, 2008년 플로리다 기소와 2019년 맨해튼 연방 기소 관련 자료는 물론, 최근까지 진행된 조사 기록까지 포함된다. 다만 피해자의 신원이나 성적 학대 영상·사진 등은 비공개 대상이다. 미국 연방법원이 이미 플로리다에서 앱스타인 관련 대배심 기록까지 공개하라는 법무부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향후 수 주 안에 상당한 분량의 비밀 문서가 추가로 쏟아질 전망이다.
문제는 이 방대한 자료 속에 트럼프 본인의 이름과 과거 행적을 언급한 이메일·메모가 다수 포함돼 있다는 점이다. 정치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인 대통령이 왜 스스로 “전부 까라”고 방향을 틀었는지, 실제로 어느 수준까지 공개가 이뤄질지에 관심이 쏠린다.
트럼프의 현재 태도를 이해하려면, 그가 올 한 해 보여온 ‘태세 전환’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트럼프와 법무부는 앱스타인 파일 추가 공개 요구에 사실상 버티기로 일관했다. 법무장관 팸 본디는 하원 기밀해제 태스크포스의 요구에 기한 내 답변을 내지 않았고, 법무부는 7월 성명을 통해 “앱스타인이 별도의 ‘클라이언트 리스트’를 보관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발표하며 추가 공개에 부정적 입장을 냈다.
이 과정에서 트럼프는 자신의 지지층이 집중된 우파 매체와 소셜미디어에서 “앱스타인 리스트 타령은 정치적 헛소리(hoax)”라며 공개 요구를 폄훼해 왔다.
그러나 민주·공화 양당 일부 의원들이 연합해 강제로 ‘앱스타인 파일 투명법’을 밀어붙이자 상황이 바뀌었다. 법안은 정치적 망신을 감수하더라도 대통령 거부권을 무력화할 수 있을 정도의 초당적 지지를 확보했고, 트럼프는 결국 서명을 선택했다. 이후 그는 “나는 숨길 것이 없고, 진짜 문제는 민주당 인사들”이라며 입장을 돌려 “전부 공개하라”는 쪽으로 메시지를 전환했다.

트럼프의 이름이 앱스타인 문서에 등장한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2024년 초, 앱스타인 관련 민사소송 기록 수백 페이지가 추가로 공개되면서 법원 문서 속 가명 ‘Doe 174’가 트럼프로 특정됐다는 분석이 나왔다. 해당 문서들은 트럼프와 앱스타인이 1990년대 후반 플로리다 마러라고 등지에서 교류한 사실, 파티 참석자 명단 등을 언급하고 있지만, 트럼프가 성범죄에 가담했다는 법적 판단이나 기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올해 11월에는 하원 민주당이 앱스타인 유산(estate) 측에서 확보한 2만여 쪽에 달하는 이메일과 문서를 추가로 공개하면서 논란이 다시 불붙었다. 일부 이메일에서 앱스타인은 트럼프가 “여자아이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knew about the girls)”고 주장하거나, 그를 “미치광이”라고 부르는 표현을 사용했다.
다만 법무부와 FBI는 지금까지의 검토 결과, 앱스타인이 주장한 여러 내용 가운데 상당수가 확인되지 않았고, 새로이 기소를 정당화할 만한 ‘단일 클라이언트 리스트’나 결정적 증거는 찾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이름이 여러 문서와 이메일에 오르내리는 상황에서 트럼프는 왜 법안 서명과 “전면 공개”를 택했을까. 워싱턴 정가와 법률가들 사이에서는 크게 세 가지 정치·전략적 계산이 오간 것으로 풀이된다.
첫째, ‘역공 모드’ 전환이다.
앱스타인 파일에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전 하버드대 총장 래리 서머스, 민주당 거부 후원자 리드 호프먼 등 유명 민주당 인사들의 이름과 행적도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법무부는 최근 이들 관계를 다시 검토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트럼프 진영 일부는 “어차피 양쪽 다 상처를 입는 게임이라면, 적 최소한만 다치게 할 수는 없다”는 판단 아래, 차라리 전면 공개를 통해 민주당 측 부담을 키우는 쪽을 선택했다는 관측을 내놓는다.
둘째, ‘이미 다 드러난 상처’ 전략이다.
트럼프와 앱스타인의 과거 인연, 마러라고 파티 사진, 일부 민사소송 문서 속 언급 등은 이미 언론과 법원 문서를 통해 상당 부분 공개된 상태다. 트럼프 입장에서는 “새로운 스모킹 건이 나오기보다는, 이미 알려진 이야기들이 재탕되는 수준에 그칠 것”이라고 보고, 오히려 정면 돌파를 통해 “숨길 것 없다”는 이미지를 지지층에게 각인시키려 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셋째, 법·정치적으로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의회의 압박은 거세졌고, 일부 공화당 강경파까지 공개 요구에 가세했다.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앱스타인 파일을 감추려 한다”는 역풍이 뒤따를 가능성이 컸다. 결국 트럼프가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 카드가 “의회가 만든 공개 법안을 서명해 자기 공으로 돌리는 것”뿐이었다는 분석도 힘을 얻는다.
이 세 가지 해석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분석일 뿐, 트럼프 본인이 내부 계산을 공개적으로 설명한 적은 없다. 다만 타임라인과 발언, 법안 통과 과정 등을 종합할 때, 단순한 ‘정의감’만으로 전면 공개를 수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에는 여야를 막론하고 대체로 의견이 모인다.

이번 사태를 둘러싼 혼란에는 정보의 성격과 피해자 보호라는 두 가지 난제가 겹쳐 있다.
우선, 대중이 흔히 말하는 ‘앱스타인 클라이언트 리스트’는 법무부 설명대로 “형식적인 명단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공식 입장이다. 대신 여러 해에 걸쳐 작성된 FBI 메모, 이메일, 사진, 비행 로그 등 조각난 기록 속에 각종 이름과 단서가 섞여 있는 형태라는 것이다.
두 번째 쟁점은 ‘얼마나, 어떻게 공개할 것인가’다. 이미 11월에만 2만 쪽이 넘는 이메일과 문서가 한꺼번에 공개되자, 일부 피해자들은 “이름과 사생활이 무방비로 노출돼 2차 피해를 겪고 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피해자 대리인들은 “가해자와 관련된 공적 인물의 책임 추궁에는 동의하지만, 피해자 신원과 사적인 피해 내용까지 대중 앞에 그대로 던져지는 현재 방식은 또 다른 폭력”이라고 비판한다.
결국 ‘전면 공개’라는 정치적 구호 뒤에는, 피해자 보호와 공익 사이의 균형이라는 어려운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법률상으로는 앱스타인 파일 공개 여부는 더 이상 트럼프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다. ‘앱스타인 파일 투명법’에 따라 법무부는 정해진 기한까지 비기밀 자료를 공개해야 하며, 이미 연방법원까지 대배심 기록 공개에 동의했다.
그럼에도 트럼프와 행정부가 실질적으로 쥔 카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워싱턴 정가에서는 대체로 다음 세 가지 시나리오를 거론한다.
첫째, 법이 요구하는 최소 수준에 맞춘 ‘형식적 이행’이다.
피해자 신원 보호와 진행 중인 수사라는 이유로 광범위한 부분을 가리고, 이미 언론을 통해 알려진 자료를 중심으로 ‘1차 공개’를 마무리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법적 의무는 형식상 이행하지만, 실질적 투명성은 제한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둘째, 정치적으로 유리한 부분을 부각하는 ‘선택적 공개’다.
민주당 유력 인사의 이름이 등장하는 메모와 이메일을 집중적으로 정리해 공개 브리핑을 하고, 트럼프를 언급한 문서에 대해서는 “허언, 과장, 이미 반박된 주장”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식이다. 실제로 언론 보도 가운데 일부는 앱스타인 문서 속 클린턴·트럼프 관련 주장에 대해 “입증되지 않았거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평가해 왔다.
셋째, 일정 부분을 남겨두고 ‘지속적 협상 카드’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현재도 맥스웰 측은 대배심 증언 공개에 반대하며 향후 법적 구제를 모색하고 있고, 일부 수사는 “진행 중”이라는 명목 아래 자료 일부를 비공개로 유지할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이런 법적 여지를 활용해 민감한 이메일과 내부 메모를 단계적으로 늦추거나, 타 정치 사안과 연계해 흥행 이슈로 활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어느 시나리오가 현실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더 이상 ‘앱스타인 파일’이 음모론과 온라인 소문만의 영역이 아니라, 대통령과 의회, 법원이 얽힌 공개적 정치·법적 과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트럼프가 던진 “전부 까라”는 승부수가, 결국 누구에게 가장 큰 상처를 남길지는 이제 조용히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문서들의 내용이 말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