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평가 8년 만에 신뢰 무너진 수능 영어
2026학년도 수능 영어 1등급 비율은 3.11%에 그쳤다. 절대평가 전환 이후 가장 낮은 수치이자, 상대평가 1등급 기준인 4%보다도 낮다. 90점 이상 1등급을 받은 학생은 1만 5천여 명 수준으로, 국어(4.67%), 수학(4.62%)보다 훨씬 적다.
정부는 2018학년도부터 수능 영어를 절대평가로 바꾸며 “과도한 경쟁과 사교육 부담을 줄이겠다”고 약속했다. 90점만 넘으면 모두 1등급이니, 영어가 정시 당락을 가르는 ‘킬러 과목’에서 빠져야 한다는 취지였다. 실제로 도입 첫해 1등급 비율은 10%를 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영어 1등급 비율은 5~7%대를 오르내리더니, 올해는 3.11%까지 떨어졌다. 해마다 등락 폭이 크고, 다른 과목보다도 낮은 1등급 비율은 “절대평가라면서 왜 더 불안정해졌느냐”는 의문을 낳는다. 영어 관련 학계에서는 “절대평가 취지가 무색해졌다”며 제도 전면 재검토, 나아가 절대평가 폐지까지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절대평가를 다시 상대평가로 되돌리는 것만이 해법일까. 이번 사태는 더 근본적인 질문, 곧 “AI 시대에 영어를 지금처럼 모두에게 필수 과목으로 둘 필요가 있는가”라는 물음을 우리 앞에 올려놓는다.
시험 영어 10년, 회화는 다시 학원에서 시작
한국 사회가 영어에 쏟아붓는 시간과 돈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교육부·통계청의 사교육비 조사에 따르면 초·중·고 사교육비 총액은 30조 원에 육박하고, 사교육 참여율은 80%에 이른다. 과목별로 보면 영어 사교육비가 학생 1인당 월평균 지출에서 가장 높게 나타난다는 분석도 있다.
그럼에도 “수능 영어를 잘 본다”는 것과 “영어로 말하고 듣는다”는 것은 여전히 다른 문제다. 입시 현장에서는 “고3 때까지 독해·문법 위주 수업으로 버티다가, 대학에 들어가서야 ‘이제 회화 좀 해야겠다’며 다시 학원에서 처음부터 시작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여러 연구와 현장의 경험이 오래전부터 지적해 온 현실이다.
정책 보고서와 학술 연구에서도 비슷한 평가가 이어진다. 막대한 영어 사교육 투자와 어학연수 열풍에도 불구하고, 실제 영어 의사소통 능력은 기대만큼 향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초·중·고 10년 동안 배운 영어는 주로 시험을 위한 독해·문법, 제한된 유형의 듣기에 맞춰져 있었고, 일상적인 말하기·쓰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 지점에서 하나의 결론이 보인다.
지금의 수능 영어는 “아이들이 실제로 영어로 말하고, 듣고, 쓰도록 만드는 과목”이 아니라 “대학 입시라는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풀어야 하는 시험 과목”으로 작동해 왔다. 그렇다면 “영어 회화 때문에 영어를 필수로 둬야 한다”는 논리는 이미 설득력이 상당 부분 약해졌다고 봐야 한다.

AI가 바꾼 ‘영어의 필요성’이라는 질문
여기에 AI라는 변수가 끼어들면서 문제는 더 복잡해졌다. 번역과 요약, 이메일 작성, 심지어 실시간 통역까지 척척 해내는 AI 도구들이 스마트폰 안에 들어와 있다.
유럽의 한 연구에서는 구글 번역과 같은 기계번역 도입이 활발한 지역일수록, 번역·통역 관련 일자리 증가세가 눈에 띄게 둔화됐다는 결과도 나왔다. “기계번역이 번역가를 완전히 대체한다”고 말하기는 이르지만, 최소한 ‘기본적인 번역 작업’을 위해 영어를 오래 공부해야 하는 필요성은 줄고 있다는 신호다.
국내외 언론에서는 “AI 번역 시대에도 영어 실력이 여전히 중요한가”를 두고 찬반이 갈린다. 한쪽에서는 “번역 품질이 여기까지 올라온 마당에, 회의록·이메일 정도는 그냥 돌리면 된다”고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최신 연구·기술 문서, 고급 정보 접근과 AI 활용은 여전히 영어 위주이기 때문에, 오히려 영어 잘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격차가 커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실제로 생성형 AI가 학습하는 방대한 텍스트 데이터의 절대다수가 영어 중심이라는 분석은 여러 곳에서 나온 바 있다. 최신 기능, 고급 설정, 세밀한 프롬프트 작성법, 기술 문서 상당수가 영어로 먼저 나오고,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것은 그 다음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일상적인 번역·정보 탐색 수준에서는 AI 덕분에 영어 울렁증이 상당 부분 상쇄되고 있다.
반대로, 고급 정보·연구·AI 활용 영역에서는 영어를 잘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격차가 오히려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 두 현실을 함께 볼 때, “모든 학생에게 똑같은 영어 시험을 강제하는 현재 구조”가 과연 AI 시대에 합리적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모두에게 똑같은 영어가 아니라, ‘트랙’과 ‘선택’의 문제
지금 수능 구조는 이렇게 요구한다.
“문·이과를 막론하고, 어디에 살든, 무엇을 전공하든, 모두가 똑같은 수능 영어 시험을 치르고, 동일한 1~9등급 표 위에서 경쟁하라.”
그러나 AI 시대의 교육을 생각하면 다른 그림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이런 구조다.
첫째, 수능 영어를 ‘선택 교과’로 전환하는 방식이다.
영어·통번역·국제학, AI·데이터, 일부 인문·사회 계열처럼 영어 활용이 직결되는 학과군에 한해서만 영어 성적을 필수로 요구하고, 나머지 학생에게는 영어를 수능 필수 과목에서 빼주는 것이다. 그 대신 이들은 AI 리터러시, 데이터 문해, 모국어 독해·쓰기 강화 과목 등을 선택할 수 있다.
둘째, 영어 평가의 목적을 ‘실용 회화’와 ‘고급 읽기’로 분리하는 방식이다.
일상 회화 수준의 영어는 학교 내 수행평가나 학교 자체 인증시험 등으로 가볍게 확인하되, 수능 영어는 “영어로 고급 정보를 읽고, 필요하면 AI를 도구로 활용해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평가하는 고급 트랙으로 한정하는 구상이다. 이 트랙은 진로상 필요한 학생들만 선택하게 할 수 있다.
셋째, AI 활용 능력을 영어와 분리해 인정하는 방식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영어 원문을 직접 속독하지 못하더라도, AI 번역·요약 도구를 활용해 필요한 정보를 찾고, 비교하고, 검증하는 능력을 별도의 교과(예: ‘AI 활용·정보 리터러시’)로 평가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영어를 깊이 파지 않는 학생도 “AI를 도구로 쓰는 역량”을 공교육 안에서 일정 부분 보장받을 수 있다.
이런 전환이 이루어진다면, 영어는 더 이상 “대한민국 모든 10대가 똑같이 매달려야 하는 필수 과목”이 아니라, “진로와 필요에 따라 깊이와 방식이 달라지는 선택 과목”으로 위치를 바꿀 수 있다.

절대평가를 논하기 전에, ‘왜 영어인가’를 먼저 묻자
수능 영어 난이도 조절 실패는 분명한 행정 실패다. 1등급 비율이 3% 초반까지 떨어진 상황에서 “절대평가의 취지에 대체로 부합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영어 관련 학회가 절대평가 폐지를 요구하고, 교육 당국이 영어 평가 방식 전반을 재검토하겠다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논의가 “절대평가냐, 상대평가냐”라는 틀 안에서만 맴돈다면, 지금 세대가 겪는 더 근본적인 불편함은 그대로 남는다.
시험을 위해 10년 넘게 영어를 배우지만 회화는 다시 학원에서 시작해야 하는 구조,
사교육비 30조 시대에 가장 많은 돈을 쓰는 과목이 여전히 영어인 현실,
그리고 스마트폰 속 AI가 이미 일상 번역과 독해의 상당 부분을 대신하고 있는 풍경까지.
AI 시대의 교육 개혁은 결국 “무엇을 가르치느냐”보다 “왜 그것을 모두에게 똑같이 가르치느냐”를 묻는 일에서 출발해야 한다.
수능 영어 절대평가를 폐지할 것인지 여부는 그다음 문제다. 먼저 묻고 결정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영어 회화를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시험 영어로 아이들의 10년을 채우는 지금의 구조를 계속 유지할 것인가.”
“AI 시대, 영어를 여전히 전원 필수 과목으로 둘 것인가, 아니면 선택과 트랙으로 돌려 각자의 필요에 맞게 배우게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서지 않는 한, 내년에도 우리는 “난이도 조절 실패”라는 똑같은 기사 제목을 또 한 번 읽게 될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