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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의 밤, 누가 나라를 지켰나? 12·3, 헌법이 가장 위태로웠던 밤의 재구성 대국민 담화의 숨은 대본, 과장된 ‘위기’와 조작된 명분 국회를 겨냥한 헬기와 장갑차, 작전명도 없이 밀어붙인 진격 “의원들을 끌어내라”는 지시, 현장에서 멈춘 방아쇠 이시한 기자 2025-12-03 00:15:40

2024년 12월 3일 밤, TV 자막에 두 글자 ‘계엄’이 뜨던 그 순간으로부터 꼭 1년이 지났다. 그날 밤 여섯 시간 남짓 이어졌던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 사이, 청와대와 국방부의 비화(암호) 전화는 쉼 없이 울렸고, 국회 앞에는 계엄군과 시민들이 뒤엉킨 채 새벽을 버텼다. 1년이 지난 지금, 재판정에서 새로 드러난 진술과 기록, 그날 현장에서 몸으로 막아냈던 시민·군인·경찰의 증언들을 바탕으로, 우리는 헌법이 가장 위태로웠던 그 밤을 다시 한 번 타임라인 위에 세워 본다. 



1. 다시 그 밤으로 – “갑자기 TV에 뜬 두 글자, 계엄”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27분.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중간에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라는 말이 TV 자막에 찍히는 순간, 한국 사회는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현재형 쿠데타’와 마주했다.

다음날 새벽 4시 30분, 계엄이 공식 해제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6시간 남짓. 하지만 그 사이 국회의사당에는 무장 병력이 투입됐고, 군 헬기가 국회 상공을 오갔으며, 경찰특공대와 특전사, 방첩·정보부대까지 동원되는 ‘입체 작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1년이 지난 지금, 재판정과 특검 수사 기록, 그리고 군·경 증인들의 증언을 통해 그날 밤의 ‘보이지 않던 장면들’이 하나둘 드러나고 있다. 그림은 분명해졌다.

대통령과 극소수 참모·군 지휘부가 헌법 질서를 거스르는 ‘내란 행위’를 준비했고, 그에 맞선 것은 야당 정치인들만이 아니었다. 국회 울타리를 넘던 시민들, 부당한 명령을 끝내 집행하지 않은 군인·경찰, 그리고 “이건 아니다”라며 발을 뺀 공직자들의 작은 ‘항명’들이 이 6시간을 되돌려 놓았다.


2. 계엄은 ‘생각난 김에’가 아니었다 – D-2부터 울리기 시작한 비화폰

사건의 재구성은 계엄 이틀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검이 공개한 대통령경호처·군 비화(암호)전화 통화 기록과 군 지휘관들의 진술에 따르면, 12월 1일부터 이미 ‘계엄 작전 설계’가 본격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김용현 전 장관은 검찰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대통령이 “만약 계엄을 하게 되면 필요한 게 무엇이냐”고 묻자, 계엄 선포문, 국무회의 안건, 대국민 담화문, 포고령 등 구체적인 요소를 제시했고, “가서 준비해 보겠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그 시각이 12월 1일 오전 11시경으로 특정된다. 

그 뒤 비화폰 통화 기록을 보면, 김 전 장관은 수도방위사령관, 방첩사령관, 특전사령관 등 ‘계엄 핵심 지휘관’들에게 잇따라 전화를 걸어 수십 분씩 통화를 한다. 이어 이들 사이에서 “합동체포조 편성”, “국회·선관위·여당·야당 당사·여론조사 기관 6곳 확보” 같은 내용이 메모로 정리된다. 나중에 법정에 선 지휘관들은 “혼자 끄적거린 메모일 뿐”이라고 부인했지만, 특검은 이를 ‘구체적 계엄 실행 계획의 초안’으로 본다. 

즉, 12월 3일 밤의 계엄 선포는 ‘정치적 궁지에서 나온 즉흥적 선택’이 아니라 최소 이틀 전부터 전화와 메모, 지시를 통해 치밀하게 준비된 작전이었다는 사실이 재판을 통해 드러난 셈이다.



3. D-1, “깜짝 놀랐지? 내일 보자!” – 대통령이 직접 챙긴 군 수뇌부

계엄 전날 밤인 12월 2일, 비화폰은 다시 분주해진다. 특검이 확인한 기록에 따르면 김용현 전 장관은 밤 10시 무렵 방첩사·수방사·특전사·육군참모총장 등 주요 지휘관들에게 1~2분짜리 짧은 통화를 연속으로 걸었다. 

특전사령관 곽종근 전 사령관은 “그 통화에서 대통령 목소리를 들었다”고 진술했다. “며칠 뒤 준비되면 보자”는 말에 이어, 장관이 “깜짝 놀랐지? 내일 보자”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는 자술서도 남겼다. 비화폰 통화 기록은 이 진술의 시간을 거의 정확히 뒷받침한다. 

계엄 하루 전,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이 직접 군 수뇌부를 돌며 ‘내일’을 예고했다는 이 장면은, 훗날 법정에서 ‘우발적 계엄’이라는 변론의 설득력을 크게 깎아내린 대목이다.


4. 12월 3일 밤, TV에서 시작된 계엄 – “북한 위협”과 “범죄자 소굴”

12월 3일 밤 10시 23분,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시작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한 연설은 곧 야당을 “범죄자 집단의 소굴”, “반국가세력”으로 규정하는 날 선 언어로 채워졌다. 대통령은 북한의 위협과 ‘친북 세력’을 언급하며, 헌법 제77조를 근거로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나중에 드러난 사실은 대통령이 언급한 ‘위기’가 상당 부분 과장되거나 조작됐다는 점이다. 국방부·정보당국의 보고 어디에도 북한군의 특이 동향은 없었고, 대신 국방부는 특전사·707특임단 등 특수부대에 “북 관련 상황이 심각하다”는 거짓 명분을 내세워 출동 준비를 시켰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계엄 선포 직후, 대통령은 국정원 고위 간부, 수도방위사령관, 특전사령관, 경찰청장 등 6명의 지휘관에게 다시 비화폰을 걸었다. 각각의 대상은 정치인 체포, 국회 봉쇄, 선관위 서버 확보 등의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게 특검과 검찰의 공소 사실이다. 



5. 국회로 향한 헬기와 장갑차 – “문을 부숴서라도 들어가라”

계엄이 선포된 지 약 20분 뒤, 국회는 하나의 ‘전장’으로 설정됐다. 대통령은 계엄사령부에 국회 봉쇄와의원 체포계획을 승인했고, 군은 특전사 병력을 헬기로 국회에 투입하는 작전을 돌입시켰다.

재판 과정에서 특수전사령부 참모장 박정환 준장은 상관인 곽종근 전 특전사령관이 전화로 “의원들을 끌어내라”, “문을 부숴서라도 들어가겠다”고 복창하는 장면을 직접 들었다고 증언했다. 이 통화의 상대가 국방부 장관으로 추정된다는 진술도 더해졌다. 

검찰이 제시한 통화 기록에 따르면, 계엄 당일 밤 수도방위사·특전사 지휘부와 경찰 수뇌부를 잇는 전화는 끊임없이 오갔다. 특검은 이 전화망을 통해 “국회의원 체포조 편성, 국회 담장 월담 후 진입, 국회의장 장악” 등 구체적인 실행계획이 내려갔다고 본다. 

그러나 이 작전은 ‘완전한 실행’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현장에서 명령을 받은 일부 지휘관과 실무자들이 멈춰 섰기 때문이다.


6. 특전사령관의 ‘항명’과 수도방위사의 시간 끌기

12월 7일자 한 일간지 인터뷰에서 특전사령관 곽종근 전 사령관은 “의원들을 끌어내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따르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그는 “항명인 줄 알면서도 따르지 않았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수도방위사령부 역시 국회 상공 헬기 비행 허가를 여러 차례 보류했다. 나중에 공개된 기록을 보면, 국회 상공 비행 허가 요청은 10시 48분부터 여러 차례 올라왔지만, “목적이 불명확하다”는 이유로 거부되다가 11시 31분이 되어서야 어렵사리 승인된다. 그 사이 국회는 국회대로 울타리를 넘어 들어온 의원·시민들로 ‘사람의 벽’을 세우고 있었다.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관은 탄핵심판에서 “계엄 선포는 지금도 위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증언하며 계엄을 옹호했지만, 정작 “병력에 국회 담을 넘으라고 지시했느냐”는 핵심 질문에는 진술을 거부했다. 군사재판에서는 공소사실을 부인하며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결국 국회 본회의장으로 진입한 것은 완전무장 병력이었지만, 그 병력은 의원들을 실제로 끌어내거나 체포하는 단계까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 ‘멈춤’이 없었다면, 그날 밤 국회 안에서의 물리적 충돌과 인명 피해는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7. 경찰과 소방, 그리고 ‘하지 않은 일’의 의미

계엄 당일 밤, 경찰은 국회 주변을 겹겹이 봉쇄하고 의원들의 진입을 막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장면도 존재했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에서는 ‘계엄 관련 비상대기자 명단’이 작성됐고, 일부는 나중에 법정에서 “그게 국회의원 체포조인 줄 몰랐다”고 증언했다. 

내무부 장관은 소위 ‘언론 길들이기’ 작전도 병행했다. 검찰 공소장과 국회 청문회 증언에 따르면, 장관은 소방청과 경찰에 진보 성향 언론사와 방송국, 여론조사 기관의 전기·수도 공급을 차단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당시 소방청장은 “그런 지시를 받았지만, 결국 아무 조치도 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결과적으로 이 명령은 실제 실행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쿠데타는 ‘행동한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날 밤,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것은 정반대였다. 법정에서 하나둘 드러난 것은 ‘하지 않은 일들’의 기록이다. 전기와 물을 끊지 않은 공무원, 헬기 투입을 미루거나 완급을 조절한 지휘관, “의원들을 끌어내라”는 지시에 끝내 발을 뗀 특전사령관까지. 이들의 소극적 저항과 침묵 역시 헌정을 지킨 한 축으로 남게 됐다.


8. 시민들이 만든 ‘사람 방패’ – 국회 앞으로 모여든 밤의 행렬

계엄 선포 소식이 전파되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포털이 아니라 메신저였다. 텔레그램·단체 채팅방엔 “국회 앞으로 모여달라”는 메시지가 쏟아졌고, 11시 무렵부터 여의도 국회의사당 주변에는 시민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SNS 라이브 방송을 켠 시민들은 “지금 국회가 가로막혔다”, “경찰이 의원들을 못 들어가게 한다”는 현장 상황을 그대로 중계했다. 일부 시민은 울타리를 넘는 의원들에게 손을 내밀어 끌어올렸고, 어떤 이들은 국회 앞으로 배치된 군의 전술차량 앞에 서서 길을 막았다. 계엄군 장갑차 앞에 서 있는 시민들의 사진은 다음날 주요 언론 1면을 장식했다. 

이 장면은 재판 과정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된다.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갈 수 없었던 의원들이 시민들 도움을 받아 담을 넘었다”, “시민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계엄 해제안이 통과됐다”는 증언은, ‘12·3 사태’가 정치 엘리트들만의 싸움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9. 새벽 1시 2분, 국회가 계엄을 뒤집다

12월 4일 0시 48분, 우여곡절 끝에 본회의가 개의된다. 여야를 막론한 190명의 의원이 자리를 채웠고, 1시 2분, 계엄 해제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이 가운데는 대통령과 같은 당이던 여당 의원 18명도 포함돼 있었다.

“계엄 선포는 헌법이 정한 절차를 어긴 위헌 행위”라는 국회의장의 선언과 함께, 국회는 군과 경찰에 “즉시 원대 복귀하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사실상 입법부가 행정부·군 통수권자에게 ‘헌정 파괴 중단’을 요구한 것이다.

이 결의 직후, 국회 밖에 모여 있던 시민들의 박수와 환호 소리가 새벽 공기를 갈랐다. 어떤 이들은 “87년 6월 항쟁 이후 가장 극적인 순간”이라고, 또 어떤 이들은 “군부 쿠데타를 시민과 의회가 실시간으로 막아낸 최초의 사례”라고 회고했다. 


10. 4시 30분, 6시간의 계엄이 끝나기까지

국회의 해제 의결만으로 계엄이 자동 종료되는 것은 아니었다. 헌법상 대통령이 계엄을 해제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야당은 “당장 사퇴하라”고 요구했고, 여당 내에서도 “계엄은 잘못됐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국제 사회의 우려와 금융시장 패닉이 겹치자, 청와대는 결국 새벽 4시경 각료들을 다시 모았다. 

4시 27분, 대통령은 브리핑을 통해 “국회가 소집되면 계엄을 해제하겠다”고 밝혔다. 곧 이뤄진 국무회의에서 계엄 해제가 의결됐고, 4시 30분, 비상계엄은 공식적으로 끝났다. 군은 국회와 광화문 일대에서 철수했고, 시민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입헌주의의 승리’였다. 그러나 1년 뒤 재판정에서 드러난 것은, 그 승리가 결코 자동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11. 법정에서 다시 열린 12·3 – ‘내란 우두머리’와 함께 선 사람들

계엄은 끝났지만 책임 문제는 남았다. 국회는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켰고,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파면 결정을 내렸다. 이어 형사재판에서 검찰과 특검은 전 대통령에게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적용했고, 국방부 장관·방첩사령관·특전사령관·수방사령관·경찰청장 등 이른바 ‘계엄 39인’을 차례로 법정에 세웠다. 

재판 과정에서 가장 주목받은 대목은 두 가지다.
첫째는, 대통령이 “의원들을 끌어내라”, “총을 쏴서라도 막아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는지 여부다. 여러 군인이 “상급 지휘관으로부터 그런 지시를 전달받았다”고 증언했고, 변호인단은 “오해”라고 맞섰다. 일부 증인은 법정에서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대통령의 과거 발언을 인용하며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린다”고 했다.

둘째는, 누가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의 문제다. 방첩사령관은 “그날 아무 일도 없었다”며 계엄 모의 관여를 부인했지만, 휴대폰 메모와 비화폰 통화 기록은 그가 핵심 설계자 중 하나였음을 시사했다. 특검은 ‘계엄을 가능하게 한 사람들’과 ‘계엄을 멈춰 세운 사람들’을 가려내는 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1년이 지난 지금, 전직 대통령은 내란·군형법 위반 등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고, 특검은 “11개 혐의에 대한 영구적 수사”를 진행 중이다. 여당 출신 한덕수 전 총리 역시 계엄 과정에서의 직무유기·내란 방조 혐의로 기소돼, 특검은 그에게 징역 15년을 구형했다. 그는 “계엄에 반대했다”고 주장하며 대부분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12. 시민과 군인, 그날 한국은 어떻게 ‘반(反)쿠데타’를 만들었나

12·3 비상계엄 사태는 ‘실패한 쿠데타’로 요약되곤 한다. 그러나 그 동안의 재판과 취재를 통해 드러난 것은, 이것이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저지된 내란’이었다는 점이다.

대통령과 일부 군·경 지휘부가 헌법 질서를 뒤집으려 했던 바로 그날, 국회로 달려가 울타리를 넘는 시민들, 위헌적 명령을 끝내 집행하지 않은 군인과 공무원, 그리고 야당·여당의 일부 의원들까지. 이들의 선택이 아니었다면, 그 밤의 6시간은 지금과 전혀 다른 결과를 남겼을 것이다.

1년이 지난 오늘, 한국 사회가 다시 묻게 되는 질문은 어쩌면 단순하다.
“그날,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리고 비슷한 날이 또 온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 질문이 계속되는 한, 12·3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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